모두가 비웃은 미친 프로젝트 (경부고속도로)
본문
*본문 캡션 내용*
1️⃣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를 지을 상황이 아니었음
경부고속도로를 계획하던 시기,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음.
→ 1인당 국민총생산 약 142달러
→ 수출액 약 3억 2천만 달러
→ 실업률 6.2%
→ 물가상승률 12%
그야말로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던 시대였음.
2️⃣ 고속도로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음
당시 한국은 철도 중심 국가였고
고속도로 개념도 매우 낯설었음.
지금처럼 IC, 톨게이트, 폐쇄식 영업체계 같은 개념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음.
심지어 고속도로 나들목을
철도역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함.
3️⃣ 전문가들도 반대했음
당시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에 고속도로가 필요 없다고 보는 분위기가 강했음.
이유는 단순했음.
→ 차가 별로 없음
→ 돈이 너무 많이 듦
→ 철도와 국도가 이미 있음
→ 개발도상국은 식량과 농업이 우선임
국제기구에서도
“개도국이 고속도로에 돈을 쓸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봤음.
4️⃣ 정치권과 언론도 우려가 컸음
야당은 강하게 반대했고
언론도 대체로 신중론을 냈음.
당시에는 가뭄도 심했고
지역 균형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왜 하필 서울과 부산을 먼저 잇느냐”는
비판도 컸음.
즉 경부고속도로는
시작부터 모두가 박수친 사업이 아니었음.
5️⃣ 건설비도 엄청난 부담이었음
정부 부처마다 공사비 추산도 달랐음.
→ 재무부 330억 원
→ 서울시 180억 원
→ 육군 공병감실 490억 원
→ 현대건설 280억 원
→ 건설부 450억 원 수준
실제 건설비는
약 429억 원이 들었음.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국가적 도박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금액이었음.
6️⃣ 공사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음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토 대동맥이었음.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기술도, 장비도, 경험도 부족했음.
산을 깎고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야 했음.
특히 옥천 인근 당재터널 구간은
낙반 사고까지 발생한 대표적인 난공사 구간이었음.
7️⃣ 희생도 컸음
공사 중 공식적으로 77명이 목숨을 잃었음.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도로이기도 함.
그래서 지금도 충북 옥천 금강휴게소 인근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 있음.
8️⃣ 그런데 공사 속도는 믿기 어려웠음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전 구간 개통됨.
서울과 부산을 잇는
약 400km가 넘는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 만에 완성한 것.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속도였음.
9️⃣ 완공 후 대한민국은 완전히 달라졌음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기 시작했음.
물류 속도가 빨라졌고
고속버스 시대가 열렸고
산업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했음.
대한민국이 반나절 생활권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된 셈임.
지금도 경부고속도로는 상징 그 자체임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고속도로 중 유일한 한 자릿수 번호인 1번을 유지하고 있음.
그만큼 상징성이 크기 때문임.
사람들은 이 도로를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라
한강의 기적을 관통한
국토의 대동맥이라고 부름.
ㅡㅡㅡㅡㅡㅡㅡ
차도 별로 없던 나라가
전국을 잇는 고속도로를 만들겠다고 했던 순간.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도로는 결국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미친 도박.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야기였습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